나와 이웃이야기

비상소집(非常召集)

저녁노을님 2010. 11. 11. 15:45

 

 

 

                                [비상소집(非常召集)]

  

    1.사전적 의미: 뜻밖의 긴급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 그 일에 관계되는 사람을 급히 불러 모으는 일.

         예) 집중 호우에 대비하여 관계 공무원들의 비상소집이 이루어졌다.

         예) 경찰서를 습격한 뒤 보광당을 추격하기 위해 경방단원들에게 비상소집을 걸었는데

               태반이 불응하는 바람에 추격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던 것이다.

       2. [군사의 의미]비상사태 때에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추기 위하여 부대 밖에 있는 부대원을 불러 모으는 일.

         ‘긴급 소집’ 으로 순화.

 

 

♧시작♧

 

불을 끄고 누웠지만,

어떤 분노 같은 게 모락모락 심통을 쑤시고 올라왔다.

 

남편의 직장생활이라는 것에 대범하려 무던히 애써온 그녀였지만,

아까의 상황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상소집”이라는 전화 한 통에 기다렸다는 듯이

황망히 집을 나서는 남편의 그 새털 같은 가벼움이라니아..증말..웬수~ 

 

 

♧전말♧,,,,,

 

그 전화가 걸려온 것은 퇴근후 저녁 시간였다.

저녁 식사를 막 끝낸 남편이 침대 위에 삐딱하니 팔을 꼬누고 누워

텔레비젼을 보고 있을 때 화장대 위의 전화기가 발작적으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전화기는 집요하게 울었다.

그녀가 열번쯤 헤아렸을 때 비로소 남편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심드렁하게 무어라 군시렁해대며 나직이 이어지던 남편의 음성이

한 순간 그녀가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톤으로,

아니 일부러 들으라는 듯한 투로 부쩍 높아지는 것이었다.

 

    “뭐라고? 비상소집?”

순간 여자의 가슴이 콩~ 내려앉았다.

 

얼떨결에 설거지하던 손길을 멈추고 돌아보니

남편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 보였다.

 

짐짓 그런 남편을 외면한 채 하던 설거지를 계속하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통화를 막 끝낸 남편이 이내 그녀를 냅다 불렀다.

 

    “어이~, 양말 좀 내줘” 심각한 톤이다.

    “뭔 일이래?.  시간에?..

      퇴근했으면 그만이지, 이제사 왜 또 불러낸다냐? 뭔 사고라도 났남?”

 

그러나 입을 꾹 다문 채

외출채비에 부산하던 남편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이 여편네가 뭘 꼬치꼬치 따지고 난리야! 어여 양말이나 갖다 줘.”

그런 남편이 하도 얄미워,

 

    “화이고!~ 충성이요, 충신났네~! 저런 양반 왜 이런데서 썩히는지 몰라?”

어쩌구 하며 몇 마디 이죽거려 보긴 했지만,

그녀의 발길은 양말장 쪽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이 휑하니 나가고 구두발굽소리마저 사라지자,

여자는 날개 떨어져 나간 천사처럼 침대 모서리에 등을 기댄 채 ,

두 다리를 쭉 뻗고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허탈했다.

고작 이렇게 살자고 바득바득 결혼이라는 걸 했는가?

내 인생은 결국 이렇게 살다가 별 볼일 없이 끝장나 버리고 마는 걸까?…….

 

팍팍 푹푹 한 숨만 나왔다.

이를테면, 그녀는 인생무상, 회의, 좌절의 상태에 함뿍 빠져버렸던 것이다.

 

    “하긴, 나같이 지지리 복도 없는 년이 무슨……어휴~ 내 팔자야~”

그렇게 자조를 하는 사이 여자의 눈에는 어느새 물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딴은 그럴 만도 했다.

 

아이들은 우연히도 같은 날 수련회를 가서

모처럼 둘만의 호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가벼운 설레임마저 느꼈던 그녀로서는

느닷없는 전화 한 통에 바람같이 달려 나간 남편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휴~! 그 잘나빠진 회사에 뭐 저 혼자 근무한대? 벽창호같은 인간 같으니!”

여자는 우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부아가 부글부글 끓었다.

 

생각해보라!

예전의 달콤했던 신혼의 짜릿함은 이제 이십여년이 다 되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리고 계속되는 생활의 권태와 서서히 쌓여 가는 무관심…….

 

어디 그 뿐인가.

술이라면 구정물도 불사할 만치 들이 붓는 데다가

융통성이라곤 털끝만치도 없어 허구헌 날 손해만 보고 다니는 남편이 아니던가.

 

오늘 일만 해도 그렇다.

아무리 ‘비상소집’ 이라곤 하지만,

이미 퇴근한 직원들을 무슨 수로 죄다 불러 모을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그 시간 이미 꼭지가 돌아버렸을

많은 남자 직원들은 또 대체 무슨 수로 소집시킨단 말인가?

 

눈앞에만 있다면야 마구 패주고 싶은 사람은

분명 비상소집을 지시한 상사였지만,

 

그렇다고 호출이 있자말자 지상 명령처럼 득달같이 달려 나가는

남편의 그 알량한 주변머리도 없는 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얄밉기 짝이 없다.

 

여느 때 같았으면

입을 헤~벌리고 탐닉했을 드라마에도 어느덧 흥미가 싹 가셔 버렸다.

 

주방에서 하다 만 설거지 거리가 쌓이건 말건 그 또한 알 바가 아니었다.

    ‘설거지고 뭐고 내 알 게 뭐야! 차라리 퍼질러 잠이나 푹 자자!- ’ 

그렇게 해서 그녀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던 것이다.

 

 

♧측은♧

 

잠은 그러나 고분고분 와주지 않는다.

 

덩그런히 방안에 혼자 누워 분노에 찬 시선을 천정에 둔 채,

머릿속으론 지나온 세월들의 온갖 환영이 다큐 동영상처럼 흐른다.

 

순간 남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아까와는 다르게 서서히 변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런 남편이 전혀 이해 안되는 건 아니였다.

 

좀 전에 터뜨렸던 분격 같은 건 어느새 눈 녹 듯 녹아버리고,

문득 남편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소록소록 새어들기 시작했다.

 

    ‘하긴……그래..에휴~ ’ 

직장생활 이십여년이 다 되도록 제 나이에 비해 승진이 늦은

남편으로선 부하들의 따가운 눈총과 동기들에게의 동정과 상사들에게의

질타가 매일 출근때마다 느꼈을 게다.

 

요긴할 때 끌어 줄 이렇다할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하여 지문이 없어지도록 비비는 재주라도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도 못한 남편으로서는

오직 근무에 충실해서 상사로부터 인정받는 길만이

자신이 좀더 나은 평가와 보수로 인정받는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이젠 남편이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여자의 가슴속은 이제 서서히 아려오기 시작했다.

남편의 고뇌에 찬 영상이 갑자기 스틸사진으로 멈쳐지더니

여자는 콧날이 째앵~하니 왈칵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여자는 갑자기 용수철처럼 튕겨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얼마 전 친정에 다녀왔을 때 친정어머니가 지어준 보약 한 첩이 불현듯 떠올라

가엽고 측은한 남편에게 닳여줄 생각이었다.

 

여자용으로 지은 것이지만,

뭐 사람에게 좋다 생각하니 그깟 효력이

자기의 정성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였다.

 

약탕기에 약재를 쏟아 붓고

가스레인지에 스위치를 누르는 여자의 손길은

사뭇 흥분과 충만감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뭐~산다는 게 뭐 별건가?.. 이런 게 다 사람 사는 모습이지! 암..’

여자는 남편에 대한 안쓰러움을,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약재와 함께 몽땅 털어 넣어 끓이고 또 끓였다.

 

 

♧결말 ♧

 

이제나 저제나 속 끓이며 기다리던 남편은

자정을 훨씬 넘겨 돌아왔다.

 

엉망으로 만취한 상태였다.

꼴이 말이 아니다..

 

피곤해서 못살겠네,

짧은 인생길 왜 이다지도 고달프냐 어쩌구 하며

 

특유의 개똥철학 같은 주사를 한 바탕 질펀하게 늘어 놓더니

꼬불쳐둔 술 내놓으라며 담배 하나 척~ 꼬나 물고는,

순간 픽!~ 고꾸라지며 방바닥에 코를 박고는 이내 잠이 든다.

 

여느 때 같으면

그런 남편에게 정나미가 뚝 떨어졌으련만,

오늘만큼은 그런 남편이 오히려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귀밑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 눈길이 닿자,

지나온 세월의 편린들이 되살아나 여자는 숙연해진다.

 

    ‘불쌍한 사람, 당신은 언젠가는 빛을 볼꺼야... 쯔쯔.. ’

 

이렇게 중얼거리며 여전히 숙연함이 덕지덕지한 표정으로

해삼같이 널브러져 자는 남편의 거무튀튀한 얼굴을 안쓰럽게 내려다보던 그녀는,

 

남편의 머리맡에 나동그라져 있는 라이터를 발견했다.

무심코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색은 수신상태 불량한 텔레비젼 화면처럼

불그락 푸르락 변화무쌍해 지더니, 악마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라이터에 쓰여있는 광고 글자가,,

 

“술과 화끈한 미녀 항시 대기 [비상소집]으로 정중히 모십니다“

 

♣끝♣